episode. 3 투항
시간은 어김없이 닿는다. 무엇에든 닿는다.
그녀의 통금을 알리는 시간도 긴 항해를 횡단하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9시란 항구에 닿았다가 떠났다.
1분 2분 그리고 5분 삐걱이는 양철 대문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그녀가 들어오는 발자국의 속도에 긴장이 가득 배어있음을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다.
저 어둠을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무엇이 그녀 앞에 웅크리고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어서 다만 긴장의 끈만 아스라이 잡을 뿐,
아무도 그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는 눈치 챌 수 없었다는 것,
그것이 그 날 밤 Y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사람들의 죄였다.
J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풀 수 없는 실타레만 남은 것처럼,
그 집안의 공기는 무섭도록 처참한 몰골로 나뒹굴고 있었다.
“어떻게 하나” 어디서 실마리를 잡아야 하는지 공황 상태로 남겨진 가족들 얼굴,
다만 한 사람 H만 형광등 넘어 어둔 저쪽으로 길을 잡아 떠나고 있었다.
폭력의 기원은 어디로부터 와서 저 남자의 어깨에 화석처럼 박혀 떠나질 못하고 있을까.
어둠보다 더 검은 빛을 띤 섬 H가 떠난 자리에 껍데기로 남은 그녀 Y,
순간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는 그 처참한 광경을 경험하고도 눈물 나올 시간조차 없었다는 듯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약간 충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싱크대 앞에 넘어져 있던 Y 그녀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붉다.
그녀의 얼굴에 동백보다 붉은 꽃이 피었다.
그건 지문이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소중한 지문이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꽃,
피로 물든 꽃에 꺾인 가지가 걸려있다.
너스레처럼 덜렁이는 가지들이 잎들을 떨어뜨린다.
상처 난 잎들이 흥건히 어둠에 절였는지 무겁다. 그녀의 무겁고도 가여운 어깨가 조용히 들썩였다.
J 그녀가 Y에게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아! 큰 아가씨” 그 때쯤 이였을 것이다.
Y 그녀가 부엌칼을 뽑아든 것은, 투박하게 생긴 칼로 자신의 배를 누르며
그녀가 쏟아 놓는 말들은 절규였다. 아니 독기였다.
아니 그것은 허공에다 뱉어 놓은 쓸모없는 메아리였다.
누가 헤아려 그녀를 보듬을 것인가.
허무로 가득한 Y 그녀가 쓸쓸히 돌아선다.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가면 저렇게 허울뿐인 모습이 되어 어둠 속으로 잠길 뿐이라는 듯
다시 어둠이 가득한 집안으로 습한 바람이 스며든다.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갓 사회에 입문한 Y 그녀의 시련은 그렇게 시작되어 그녀가 처녀 시절을
마감하기 까지 자주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다.
J 그녀의 눈을 자주 어른거리게 했던 눈물의 형성에는
얼굴에, 온몸에 더러 꽃을 피워 출근하는 Y 그녀의 바보스럽도록 착한 미련도 한몫을 차지했다는 것,
우리는 그 때 모두 바보 이였을지도 모르겠다.
J 그녀가 혼인 서약을 한지 일 년 남짓 되는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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