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안뜰(粹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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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이1 2011. 10. 21. 18:50

사진은 그이 책상서랍 제일 윗칸에 간직되어 있었다. 얼마나 꺼내 보았는지 오른쪽 테두리가 접혀 실금이 나있었다. 실금은 가지를 치고 사진을 더 낡고 오래된 것으로 만들어놨다. 단지 십년간인데도 흑백의 사진을 나는 나인줄도 모를 뻔했다. 남편은 밤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무엇을 했을까? 과거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거나 현재 어떤 공간으로 떠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남편의 서재는 사방이 책으로 둘러 싸여 있는 겨우 두평을 면한 곳이다. 창문 하나에 세상이 바람이 드나들수 있는 곳, 방문을 닫으면 세상과는 단절되고 자신만의 새로운 세상을 지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밀랍의 공간처럼 누구의 발길도 허용 않는 곳에 내가 발을 들여놓은 이유는 단지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지만, 열린 문을 열고 이 방에 들어선 것이 어떤 예감 때문이다.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보다 저녁을 먹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부터 나의 의심은 시작되었다. 질투와 의구심으로 가득찬 한 여인이 비밀의 방을 열때에는 서릿발 같은 냉소도 함께 그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은 흑백의 실루엣으로 이뤄졌다. 가볍게 숙인 고개와 가늘고 긴 목선과 부드럽게 흘러내린 어깨, 처녀처럼 봉긋한 젓가슴 끝에는 여전히 팥알만한 새까만 젖꼭지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가려지지 않은 복부는 흘림체 글씨처럼 자연스럽게 곡선을 만들어 내고 꼰듯한 다리가 안전한 비율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당신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데, 불 꺼 봐'

막 샤워를 마친 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를 불러세우고 농담처럼 찍은 사진, 거실 유리창으로 비치는 빛으로 만 찍은 나의 누드 사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내려뜨린 긴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을 가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눈치 챌수 없는 사진이다. 쑥스러움의 진실이 담겨 훨씬 뇌쇄적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날리며, 그는 나의 몸을 더듬었다. 목선으로 양각된 혈관이 붉게 타고 있었다.

그후 여러번 그 사진은 마치 애인의 사진이 되어 버린 것처럼 몰래 보다 들키곤 해서 나를 긴장 시켰다.

 

그가 불러다 앉힌 여자는 술집 주인이라고 했다. 그이는 나를 친구라 소개했고 그 여인을 내게 집사람이라 소개했다. 소주 한잔을 권하며 합석을 시키자 여인은 의자를 끌어다 자연스럽게 앉았다. 다소곳하고 얌전한 말투가 내내 신경에 거슬렸지만 다른 손님이 오면 일어설테지, 한 잔이라도 더 팔기 위해 다 그렇지 뭐하고 단정지었다. 결혼 전후에도 남편의 지나친 친절에 대하여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한 친절을 생각하면 일정한 범위내의 규칙이 있었으므로 그의 청혼을 거절 할 수는 없었다. 그이의 친구들이 말하는 남편은 하나같이 괜찮은 녀석이었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그때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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