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인사가 전부인 그를 시립미술관에서 만났다
먼저 온 일행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그가 나를 보는 듯했다
붉은 장미와 여자의 나신裸身이 겹쳐진 그림 앞에 서 있는
나를 스치며 그가 지나갔다
화花르르 쏟아지는 장미향
어지럼증에 머리를 짚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색을 유혹하는 입술로 벌어지는 꽃잎
모로 누운 나신의 굴곡진 둔부가 팽창하듯 했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해져서 그의 걸음 수만큼 발을 옮겼다
풍경화 몇 점에 놓인 길 위로 그가 먼저 걸었다
담장 아래서 논 뚝 위에서 해변 가까이서
가만 가만히 음량을 조절하며 듣는 말
그는 그림을 이야기하고 나는 귀 기우렸다
과일이 놓인 정물화 건너
가판대 할머니가 젖은 생선과 함께 삭아갈 무렵
백련 앞에 멈춰 꽃잎 하나를 들추는 그, 늪의 수면이 낮을수록
잎맥 하나하나 드러나는, 드러나서 속살 훤히 들여다뵈는
나는 치마 자락을 움켜지며 수면 쪽으로 고개를 조금 내밀었다
낯빛이 맑은 수면을 가진 집 한 채 들여놓고
새벽안개 핀 연 밭으로 기침하듯 마실 다니고 싶었다
안채 바깥채가 하나로 전부인 작은집
댓돌 위 나란히 얹힌 신발과
저녁이면 노을 끝으로 조근조근
그와 나의 말들이 잦아드는 풍경화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두 해를 보내고
다시 새 날을 맞는 동안
폐선 하나 펄 속에 갇혀 아랫도리를 적시는
불임의 시간 천천히 나를 향해 손 흔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림에 대하여 무지했으므로 적당한 말을 모르는 나에게
눈 맞춤하며 그가 웃을 때
처음 웃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들키지 말아야 할 짓을 하다 들킨 처녀처럼
부끄럼 나서 걷는 종종걸음
대리석 바닥과 심장 박동 수의 변주곡 추상화처럼 인상깊었다
신열 내리려면
오백년쯤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심 정 미